남도일보 – 이순형 [2025-08-21]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에너지 미래 100년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 에너지 안보 불안, 디지털 전환의 가속 등 복합 위기 속에서, 더 이상 기존의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스템만으로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이제는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공간을 재구성하고, 지역 중심의 지산지소형 분산형 체계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그 최적지는 단연코 호남, 그중에서도 전라남도이다.
전라남도는 풍부한 해상풍력, 태양광, 바이오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재생에너지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에너지 생산지를 넘어, RE100 산업단지로의 진화가 절실하다. RE100(재생에너지 100%) 산업단지란, 산업단지 내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공급받는 시스템으로 이는 단지의 전력 수급뿐 아니라 기업 유치, 수출 경쟁력 확보, ESG 경영 측면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해 ‘에너지고속도로’ 건설과 RE100 산업단지 지정을 서남해안 지역에 추진하겠다고 공식화했다. 이는 단순한 인프라 투자를 넘어, 지역 기반 에너지 체계를 국가 단위 전환 전략으로 삼겠다는 강한 메시지이다. 서남권 해상풍력 자원을 대규모로 활용하고, 그 에너지를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 수소생산 기지 등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의 성공 여부는 결국 전력망 인프라의 혁신에 달려 있다. 기존 중앙집중형 전력망으로는 대규모 재생에너지의 불확실성과 간헐성을 감당할 수 없다. 특히 서남해안과 같이 다양한 사업자가 동시에 계통에 접속하는 상황에서는 ‘단일 피더 시간분할 공동접속’, 즉 순차 송전(Time Sharing for Shared Feeder) 방식을 함께 구축해 가야 한다. 이는 전력망 용량 부족 속에서도 여러 발전 사업자가 계통에 순차적으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으로, 전력망 혁신이 없다면 장기적 확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호남에는 지능형·자율형 전력망, 지역 에너지 저장장치(ESS), 실시간 수요 반응 시스템, 그리고 분산자원 통합 관리체계 등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데이터센터 유치 전략은 RE100 산단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핵심 요소이다. 데이터센터는 전력 다소비 산업이지만, 동시에 재생에너지 기반 운영, 폐열 재활용, AI 냉각 기술 등의 융합을 통해 RE100 실현의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지역 경제에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배후 산업단지 조성, 기자재 제조 및 유지보수 산업 육성, 고급 기술인력 양성 등으로 이어지며, 청년 일자리 창출과 인구 유입, 정주 여건 개선이라는 선순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지역 대학과 연계한 에너지·디지털 융합인재 양성 프로그램은 단기적 고용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기술기반 지역경제의 근간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민의 참여와 수용성 확보이다. 에너지는 단지 기술이나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한다. 주민이 사업의 이해관계자로 참여하고, 수익을 공유(이익공유)하며, 지역사회의 가치와 삶의 질을 함께 높여가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 병행되어야 한다.
RE100 산업단지와 전력망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이는 호남에만 국한된 지역 정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에너지 체계의 미래를 미리 실험하고 설계하는 국가적 과제이다. 호남은 이 역할을 해낼 충분한 자원과 역량,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지금, 왜 호남인가?”가 아니라, “왜 호남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필자는 앞으로 본 칼럼을 통해 RE100, 차세대 전력망, 해상풍력, 데이터센터, 고급인재 양성,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까지 아우르며, 호남이 대한민국 에너지 대전환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법을 제시해 나가겠다.
이순형 동신대 전기공학과 교수/에너지융합기술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