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한국형 차세대 전력망’과 ‘RE100 산업단지’라는 청사진을 내놨다. 골자는 간단하다. 재생에너지가 넘쳐나는 지역에 전기를 소비할 기업을 옮겨와, 그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자는 것이다. 남고 모자라는 전기는 새로 깔리는 촘촘한 전력망을 통해 주고받는다. 방향은 옳다. 특히 전남처럼 전력 자급률이 200%에 육박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 허가가 난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멋진 개념과 아이디어만으로 현실의 팍팍함을 돌파할 수 있을까? 자칫 근본적인 경제성 문제를 외면한 채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수요 없는 공급, 전남의 딜레마
차세대 전력망의 핵심은 ‘지산지소(地産地消)’, 즉 지역 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다. 현재 수도권은 블랙홀처럼 전기를 빨아들이고, 지방은 과잉 생산된 전기를 보내지 못해 애를 먹는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자는 것이 차세대 전력망의 목표다. 전남의 상황을 보자. 2023년 기준 전력 자급률은 198%에 달한다. 쓰고 남는 전기가 태반이다. 여기에 신안 앞바다를 중심으로 허가된 해상풍력 발전 용량만 16GW가 넘는다. 원자력 발전소 10기 이상의 용량이다.
문제는 이 막대한 양의 전기를 누가 쓸 것인가이다. 지금도 남아도는 마당에, 해상풍력까지 본격 가동되면 전기는 그야말로 ‘홍수’가 난다. 답은 명확하다. 전기를 많이 쓰는 공장을 유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RE100 산업단지’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선언한 글로벌 기업들을 전남으로 불러 모으자는 것이다. 정부는 ‘파격적인 전기료 할인’과 ‘규제 제로’라는 당근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기업이 움직이는 논리는 냉정하다. 과연 RE100 라벨을 달기 위해, 그리고 전기료를 조금 깎아준다고 해서 수조 원을 들여 공장을 옮길 기업이 얼마나 될까? RE100 산단이 경제적 매력을 가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전체 매출 원가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야 한다. 둘째, RE100 달성이 기업의 이익률과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 셋째, 초기 시설 투자비용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업종은 데이터센터나 일부 반도체 후공정 등 극히 제한적이다. 우리가 유치하고자 하는 ‘앵커 기업’들이 과연 이 좁은 문을 통과할까?
비싼 ‘녹색 전기’, 누가 값을 치를 것인가
전남 서부권의 광활한 해상풍력 단지에서 생산된 전기를 동부권 여수·광양 국가산단의 정유, 화학, 철강 기업에 공급하는 그림을 살펴보자. 그럴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다. 바로 ‘가격’과 ‘지불 능력’이다.
첫째, 해상풍력 발전 원가가 비싸다. 현재 국내 해상풍력의 균등화발전원가(LCOE)는 태양광이나 원자력보다 월등히 높다. 기술 발전으로 원가가 점차 하락하겠지만, 단기간에 기존 전력원 수준으로 떨어지기는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 기존에 쓰던 상대적으로 값싼 전기 대신, 몇 배나 비싼 ‘녹색 전기’를 선뜻 구매할 이유가 있을까? 지금도 산업용 전기 폭등하여 죽겠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해상풍력 전기의 발전원가는 현재의 산업용 전기보다 더 비싸다.
둘째, 대규모 전력 소비자인 철강, 석유화학 업종이 과연 RE100에 막대한 추가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있는가이다. 이들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원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에너지 비용 증가는 곧 제품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무역장벽이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RE100을 서두르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정부가 약속한 ‘파격적인 전기료 할인’의 재원을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RE100 산단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 있다.
‘경제성’과 ‘물리적 망’ 없이는 사상누각
조 단위 투자비가 들어가는 대규모 해상풍력 사업이 성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명확하다. 바로 ‘경제성 확보’와 ‘물리적 망 구축’이다.
경제성은 결국 ‘누가, 얼마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사줄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발전 사업자는 막대한 초기 투자비를 회수하고 수익을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판매할 수 있는 계약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구매자를 명확히 특정할 수 없고, 전력 가격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민간 투자자들이 선뜻 지갑을 열기는 어렵다. 정부가 투자비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매출을 보장해주는 메커니즘(FIT, FIP, 장기 고정가 계약)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대규모 사업은 첫 삽을 뜨기조차 힘들다.
물리적 망, 즉 송전망 구축도 시급한 과제다. 전남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재생에너지 전기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거나, 지역 내에서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면 대규모 송전망 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부가 한국전력의 선(先)투자를 통해 이 문제를 풀겠다고 나섰지만, 천문학적인 투자 비용과 건설 과정에서 불거질 주민 수용성 문제는 여전히 큰 숙제다.
차세대 전력망과 RE100 산단은 분명 한국 에너지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규모 해상 풍력 개발이라는 크고 어려운 문제를 풀려면 그에 상응하는 결연한 각오와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멋진 아이디어와 개념이 이런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시범 사업과 기술 개발에 큰 기대로 걸고 일 할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해상풍력 보급 확대, 원가 절감, 제도 개선, 투자 확대의 선순환을 만들려면 갈 길이 멀다. 차세대 전력망과 RE100 산업단지가 문제 해결에 도움은 되겠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해상풍력 발전 원가의 현실,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한계, 그리고 투자 유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설계라는 근본적인 경제적 이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풀어내야 한다. 그 때까지 갈 길이 멀고 이해 관계자들이 많아 풀기 힘든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복잡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하고, 대규모 송전망을 건설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규모 ESS를 건설해야 한다. 빠른 설치를 위해 대형 설치선 확보와 공급망/O&M 국산화를 일정 부분 달성해야 한다. 문제도 알고, 해법도 아는데 실천이 힘든 상황에서 ‘차세대 전력망 개발’, ‘RE100 산단’은 자칫 부족한 자원을 분산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